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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kaydiary 2024. 11. 11. 23:15

문학동네시인선 194

황인찬

 

 

바지를 입은 사람은 바지를 입고 떠난다

 

퇴근하고 집에 누워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방에서 나와 당신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여름 저녁의 거리가 너무 밝아서 몸 숨길 곳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하나 모르는 개가 여길 보고 짖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홀로 걷던 천변의 풍경이 무심코 아름답게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이 내 몸 누일 곳이 없다면 어째야 하나

 

산책 나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사를 해야 하나 산책중이시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야 하나 알긴 아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세계의 밤이 오고 늘어선 집들에 불이 켜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름밤 물가의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기 시작하는데 반팔 티셔츠 한 장뿐이라면 어떻게 하나

 

속절없이 집에 돌아가니 따스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모든 것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방에서 나온 모르는 사람이 내 등을 두들기며 사랑한다 말하는데 나도 그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면 어째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