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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지금 또 내 겨울새는야수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빙하 끝에서생명의 불씨를 물고 온다.부리에 가득히 물고 온다.꺼져가던 여리고 여린 목숨을 되살려당신과 함께 내 그림자를 띄워 보낸가을 강 위의 목마른 높은 바람을 불러세우며발갛게 빙하 끝에서내 인류와 치열을 당신의 젖은 눈매와 내 천년의 불씨를, 당신과 나의 새 원천을부리 가득히 물고 날아온다.

카테고리 없음 2025.02.27

황인찬, 증오

표기에 오류가 있었어요여기 표기가 표고라고 되어 있어요 사무실에서 선생님이 내게 말한다 이런, 정말 그렇군요나는 표고를 표기로 고친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요?선생님이 묻지만 나는 그냥 머리만 긁는다 역시 영혼일까요? 정오가 지나면 점심시간도 끝이 난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일해야 한다 나는 회사를 나와 오류동 집으로 돌아간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27

허연, 후회에 대해 적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아득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문자로 답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은하열차처럼 환한 전철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26

황인찬, 음애

아침에 눈을 뜨고 동네를 거닐다가 이르게 핀 꽃을 보았는데 그것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 보여 애통하였다 점심에 사촌 내외가 찾아와 함께 식사하였는데 아이가 복통을 일으켜 황급히 병원에 갔다 저녁에는 오래도록 기다려왔으나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었는데 결국 다 읽지 않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꿈에서는 기쁜 얼굴로 웃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것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아 곤란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고 동네를 돌다가 전날 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났는데 꽃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니 치우지 않은 책상이 보여 그것을 정리했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을 배불리 먹었고, 상하기 직전의 키위를 꺼내어 잘라먹었다 종종 마당에 빛이 내려와 한동안 머물다 떠났다 자주 슬픔을 느겼으나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24

이병률,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을 한다존재에 대한 말 같았다말의 감정은 과거로부터 와서 단단해지려니나는 단단한 내 손목이 슬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인데도 비를 셀 수 없어 미안한 밤이면매달려 있으려는 낙과의 처지가 되듯힘을 쓰려는 것은 심줄을 발기시키고 그것은 곧 쇠락한다 찬바람에 몸을 묶고 찾아오는 불안을 피할 수 없어서교차로에는 사고처럼 슬픔이 고인다 창가에 대고 어제 슬픔을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슬픔의 일부로 슬픔의 전부는 가려진다고 말해버렸다 저녁에 만난 애인들은 내 뼈가 여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검어지며 건조해져간다고 했다 손목이 문제였다귀를 막을 때도 무엇을 빌 때도 짝이 맞지 않았다 손목 군데군데 손상된 혈관을 기우느라 밤을 지새울 예정이다저 바람은 슬픔을 매수하는 임무로 고단할 것이므로나..

카테고리 없음 2024.11.23

이병률, 알겠지만

당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지요만져지는 것은 세계의 껍질이었어요자꾸 놓쳤지요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자꾸 손은 작아졌지요주머니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지요 심장이었지요내 손이 들어가는 데 딱 맞게 재단된 심장 가슴이었지요그 안에는 심장과 두 쪽의 열매그리고 그을음투성이인 냄비와 마른 벌레  빈 깡통 속 딱딱한 시간과 잠시 살아도 되겠다 싶었지요 실은 사람이었지요사람만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더듬었던 건원하지 않는 숨통의 중간이었지요 모두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져야 하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불경이었어요깊숙이 나를 넣고 나를 열망했지요불경의 좌우는 나를 붙잡기도자르고 붙이기도 했어요 지금으로도 그다음으로도 그것으로 끝이었지요내가 한 생을 살면서 읽고 사용하였던 세계는어둠 속 구석지에서 길을 잃어더듬더듬 기어오르려 했던엎..

카테고리 없음 2024.11.22

이은규, 밤의 대관람차

한 사람의 버킷리스트 대관람차 타러 가고 싶어눈 내리는 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방에 숨어드는 것 꿈속으로 입장눈 내리는 대관람차 환영합니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추운 날 관람차 문을 열자 쩍, 하고 소리가 났다 의자에 앉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환영 나는 왜 이 밤에 혼자 대관람차를 타고 허공에 떠 있는 걸까누군가 함부로 터뜨린폭죽소리의 배웅도 없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난쟁이의 미소를 흉내내고 싶었지만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잔뜩 시무룩한 표정의 밤하늘눈을 감았다 뜨니 한 밤이 지나고또 한 밤관람차가 도는 동안 밤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아이슬란드의 밤처럼 백일 동안 이어질까 명랑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오래된 버킷리스트 꿈의 대관람차잖아 바다로 뛰어드는 점점의 눈송이들 보일 리가 없잖아 이렇..

카테고리 없음 2024.11.21

권누리, 유리 껍질

너 내가 사랑했어? 지난겨울 앓던 능소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것,모두 착각이었어. 인사 없이 아기 신들을 떠나보내며얕은 분지의 새 나무들도 나를 떠올리는지 궁금해졌다. 두고 온 것과 버리고 온 것은 다른데 너 나도 사랑했어? 덩굴 자라는 모양새를 예측하게 된다면 선 책상 앞에서 조용한 의자 뒤를 차버린 기계식 주름치마의 슬픈 얼굴을 이해할까? 서서도 자는 사람을 보아 알고 있다.오래된 풍속계가 느리게 돌아간다. 너는 너의 축을 두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달려갔다. 운동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 이제 누울게 지금 집에 혼자야? 아니, 작게 말해야 해. 혼나면 어떡해. 혼나야지. 축하받으려고 너를 사랑했어. 불 끄지 않아도 잠들 수 있는 한낮봄에 태어난 사람에게 보낼 케이크를 고른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20

이수경, 팝콘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다시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중간에 내린다.서 있다가도 앉아 있다가도중간에 내린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다른 택시 다른 버스가 지나가고 연달아 지나가고 길가에는 모르는 식물이 길게 자란다.모르는 이파리들이 떨어지고이파리들 중간에 검은 점들이 마구 박혀 있다. 너에게 건 전화를 중간에 끊는다.내 말을 끊지 마 언제 돌아올 거니 아직 말이 안 끝났어 갑자기 목숨을 끊지 마 연락을 끊지 마 그렇게 먼저 끊지 마 팝콘가게에서 팝콘을 사 먹는다. 팝콘이 통 속에서 폭발하고 있다.팝콘 튀기는 사람을 보면 흰 머릿수건과 앞치마와 그가 들고 있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보면 여기는 흠 잡을 데가 없다. 여기에 왔구나여기에 오늘 하루 서 있을 셈이다.언제 돌아올 거니 너의 목소리..

카테고리 없음 2024.11.19

김이듬, 오해하는 오후

천변을 걷는다 추리닝 위에 코트 차림 춥구나 왜가리 한 마리 서 있다 외로운 느낌을 주려고 서 있는 게 아닐 텐데 외로울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부여하는 어떤 마음도 한 개 어휘와 매치가 안 된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시고 동일시하지 말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느라 멈춰섰지만 왜가리는 날아간다 날아가지 마 날 버리지 마 지난밤 술을 마시고 나는 나무를 붙잡고 있다 무슨 나무인지 짐작은 가지만 이름 맞히긴 섣부르다 다시 천변을 걸어간다 비슷한 나무가 비슷한 간격으로 있다 나중에 불러줄게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 너 혼자의 이름도 아니지만 조만간 꽃을 피우겠지 미안하지만 난 말이지 부끄럽게도 꽃을 봐야 나무를 알 수 있는 있단다 기다릴게 남아서 섣불리 서로를 오해하지 않도록

카테고리 없음 2024.11.18